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물가 안정을 책임지던 한국은행이 앞으로는 실물경제의 대표 잣대인 고용 안정까지 지켜야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여야가 동시에 한은의 정책목표로 고용안정을 추가하는 법 개정안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해외 중앙은행들도 갈수록 통화정책에서 고용을 중요한 고려 요소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한은이 이미 가진 물가안정, 금융안정 임무 외에 고용안정까지 추구하기에는 각각의 목표가 현실에서 상충될 소지가 다분해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게 한은의 입장이다.
여야 기재위 간사 “한은법에 고용안정 목표 추가”
15일 국회와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야당 간사인 류성걸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6일 한은 설립목적을 명시한 한국은행법 1조에 물가안정 외에 고용안정을 추가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여기에는 기재위 여당 간사인 고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공동 발의자로 참여했다.
한은의 책무로 고용안정을 추가하자는 입법부의 목소리는 처음이 아니다. 2015년에는 정희수 당시 기획재정위원장이, 2018년에는 서형수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비슷한 법안을 발의했다. 당시에도 여야 의원들이 공감하긴 했으나 추가 논의 없이 각 국회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야 상임위 간사가 법안을 공동 발의한 만큼 어느 때보다 통과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주요국 중앙은행도 '고용 목표' 명시
여야 간사들의 이런 한은법 개정 움직임에는 최근 세계적인 경제 상황과 각국 중앙은행의 역할이 바뀌는 추세도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으로 한은을 포함한 대부분 중앙은행의 1차 목표는 물가 안정이다. 하지만 물가 안정을 달성하는 범위 내에서 △'부속 목표'로 고용을 명시하거나(유럽중앙은행, 영국 영란은행 등) △아예 물가 안정과 동등한 ‘이중 책무(dual mandate)’로서 고용 안정을 명시하는 나라(미국 연방준비제도, 호주·뉴질랜드 중앙은행)도 있다. 현재 여야 공동의 법 개정안도 사실상 고용을 이중 책무 위상까지 올리는 것이다.
경제 정책에서 고용의 중요성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 사태 와중의 고용 불안을 물론, '비대면 경제'의 등장으로 코로나 이후 고용 부진은 구조적으로 더 심화할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이에 미국 연준은 최근 이중 책무 가운데 무게추를 물가에서 고용으로 옮기고 일정 수준 이상의 물가 상승은 용인하겠다는 '평균물가목표제'까지 도입했다. 학계에선 더 과격한 목소리도 있다.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경제학자인 올리비에 블랑샤르는 “노동 시장에 관심이 있는 연준이 물가상승률 대신 임금상승률을 정책 목표로 삼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물가, 금융안정도 벅찬데 고용까지?
그간 한은은 대체로 고용 안정까지 책무로 삼는데 부담을 느껴 왔지만 이번엔 국회 논의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입장이다. 한은 관계자는 “주요국 중앙은행 사례 등을 참고하고 내외부 의견도 종합적으로 수렴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각각의 책무가 갖는 이질적 성격을 현실에서 아우르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이미 두 책무인 물가와 금융 안정 동시 추구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고용 안정까지 추가되면 정책 결정이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가령 요즘처럼 저물가에 고용이 부진한 상황에서는 경기 부양을 위한 완화적 통화정책(금리 인하 등)이 필요하지만, 이런 조치가 자산가치 급상승과 부채 증가로 이어지면 금융 안정이라는 목표는 일부 희생될 수밖에 없다. 또 유동성 확대로 물가가 상승할 경우에도 고용이 여전히 저조하다면 물가 안정과 고용 안정 또한 엇박자가 날 여지가 있다.
이 때문에 김진일 고려대 교수 등은 지난 2018년 논의 과정에서 “고용 안정을 통화정책의 목표로 포함할 경우 (한은이) 그에 맞는 추가 정책수단을 확보해야 하며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세미나에서 “(한은이) 정책수단도 없는데 목표가 많아져 대응이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며 “한은법에 금융 안정이란 목표를 없애고 고용과 경제 안정 목표를 추가하는 방법도 있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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